어쩌다 번역
내가.. 책 번역을?
- 무슨 책❓ : 파이썬 데브옵스 프로그래밍 2/e, 원서 DevOps in Python 2/e
- 얼마 동안❓ : 2022년 7월(시작) ~ 2024년 6월(출간)
- 실제 번역은 2023년 6월까지 약 1년. 이후 출간이 밀려서, 검수 등으로 2024년 6월까지
- 작업을 하는 동안 소요시간을 트래킹(toggl track) 했는데 총 187시간이 걸린 걸로 나온다. 기록에 조금 loss가 있을텐데 대략 200시간 정도가 걸린 것 같다.
계기
제목도 그렇지만 정말 우연한 계기로 번역을 하게 되었다. 같은 곳에서 일하시는 분 중에 책 번역을 많이 하시는 분이 계셨고, 호기심에 그 분께 관심이 있다고 말씀드렸다. 마침 출판사에 갈 일이 있으니 같이 가기로 했다. 가자마자 에이콘 권성준 사장님, 황영주 부사장님을 뵈었다. 사장님께서 단도직입적으로, 쿨하게 한 번 해보라고 하셨고, 그렇게 시작되었다. 물론 처음 보는 나에게 아무 확인도 없이 맡기신 건 아니고, 샘플로 책의 한 챕터를 번역해보고 그걸로 평가를 받았다. 영어 접할 일이 많은 개발 분야의 특성상 예전부터 번역에 관심이 있었고 종종 영어 매뉴얼이나 동아리, 번역 커뮤티니에 참여해 테크 기사를 번역하곤 했었다. 하지만 책 번역을 이렇게 쉽게(?)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번역은..2년간 내 발목을 잡고 다니게 된다.
첫 번역 회고
책 선정과 번역 과장, 힘들었던 일 3가지 주제로 회고를 해보려 한다.
책 선정
책 선정은 출판사에서 어느 정도 후보를 제안해 주셨다. 3권 정도 간략히 본 후 한 권 선정하는 식으로 했다. 아무래도 처음이니 익숙하고, 넓고 얕은 주제가 적당할 것 같아서 고른 책이 DevOps in Python 2/e이었다. DevOps면 깊지는 않아도 좀 아는 분야이고 Python은 익숙한 편이라 선택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번역 과정
출판사에서는 초보 번역자인 나에게 참고하면 좋은 책과 사이트, 진행 과정, 번역 규칙 등을 제공해 주었다. 막막한 부분도 있었는데 꽤 도움이 되었다. 근본이 개발자라서 그런가 툴셋을 뭘로 할지부터 찾아봤는데 그 과정에서 CAT와 OmegaT라는 도구를 발견했지만 이걸 배우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아서 그냥 텍스트 편집기(Zettlr)와 네이버 영어사전, 국어 사전을 주로 사용했다. 기계 번역도 종종 활용했는데 DeepL, 파파고, 구글 번역기를 사용했다. 책을 번역하는 과정은 어찌 보면 단순하다.
- 원서를 받는다. 파일과 프린트 두 가지로 받았다.
- 한 장(chapter)씩 번역을 한다. 마칠 때 마다 출판사에 보낸다. 한 달 내에 마치지 못하면 대신 진행 상황을 공유한다.
- 모든 번역을 마치면 출판사에 보낸다.
- 리뷰어(또는 검수자)에게 피드백을 받고 고칠 부분은 고친다. 각종 마무리 작업을 한다.
- 출간을 기다린다.
계약에 따라 다르겠지만 번역가로서 저작권료를 받는 것은 아니고 번역료만 받게 된다. 즉 책의 판매량과 내 수입은 별개이다. 번역료는 책의 번역을 마쳤을 때 한 번, 그리고 출간 되었을 때 한 번 이렇게 두 번에 걸쳐 받았다.
한 장(chapter)을 번역하는 과정도 복잡하지 않다.
- 원서를 한 문장 읽는다.
- 이해한다.
- 한국어로 재구성해 쓴다.
- 퇴고를 통해 전체적인 품질을 높인다.
- 출판사에 보낸다. 진척상황이나 이슈도 공유한다.
- 피드백이 오면 수정한다.
힘든 일 The hard part
이제 힘든 일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앞에서 본 번역 과정은 심플하지만, 실제 실행 과정은 아주 험난하다. 우선 한 문장을 번역할 때 잘 아는 내용이고 문장도 쉽다면 술술 넘어간다. 반면 내용도 잘 모르고 표현 또한 길고 복잡하면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도, 한국어로 옮기는 데에도 몇 배의 시간이 들어간다. 기본적으로 한국어와 영어의 간극이 꽤나 멀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나 혼자 소비하려고 읽는 것이 아니다보니 독자에게 어떻게 읽힐지를 고민할 수 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번역을 할지 많은 고민이 생긴다. 두, 세 가지로 문장을 써보고 기계 번역도 해보고 그럭저럭 괜찮은 걸로 골라보지만, 퇴고할 때 다시 읽어보면 영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원문을 한국어로 번역해보고, 번역된 한국어를 영어로 다시 돌려보기도 한다. 삽질이 반복되다 보면 다시 원문으로 돌아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뭔가 꽉 막히고 진척이 없는 것 같아 지칠 때도 많았다. 혼자 문장 하나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씨름을 하는 것은 꽤나 고통스러웠다. 그래고 마감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 품질과 속도의 갈등 속에서 절충하고 넘어가게 될 때도 많았다. 가급적 매달 한 챕터 이상은 번역하려고 목표를 세웠고 지속적으로 진척을 관리한 덕분에 끝까지 할 수 있었지, 지켜야할 마감도 없고 진척 관리도 안 했더라면 중도에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과정을 혼자 해내야 하는 것도 일을 힘들게 하는 큰 요소 중 하나였다. 두 번째는 원저자와의 의사소통이다. 익숙하지 않거나 모호한 표현, 원문의 오류에 관해서 여러 차례 메일을 보냈다. 초반에는 회신이 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답장을 받기 어려워졌다. 출판사에도 연락을 해보고 에이전시 쪽에도 요청을 해보았으나 결국 회신을 못 받은 상태로 마무리할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편집자에게 듣기로는 원저자와 QnA를 주고받는 경우는 그닥 많지 않은 것 같았다. 기술 서적이라는 것이 꼭 지식을 쌓고 전파하는 목적으로 쓰는 것은 아니다보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세 번째는 개발 서적의 특징으로 인한 것이다. 코드는 직접 번역하지 않으므로 번역에 들어가는 시간은 거의 없다. 하지만 코드는 실행을 해봐야한다. 검증을 위한 목적도 있고 코드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하지만 책의 모든 코드가 깔끔하게 그리고 쉽게 실행할 수 있는 상태로 있지는 않다. 그리고 코드를 이해하려면 기반 기술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도 시간이 만만치 않게 들어간다. 코드에 오류가 있어 이를 수정하기 위해 시간이 들어가기도 하고, 익숙치 않은 기술이라면 따로 공부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전체 기간에 관한 것이다. 처음 시작할 때는 6개월 정도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근거 없는 자신감..). 하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고 결국 1년을 붙잡고 있게 되었다. 보통 일주일에 3번 이상, 퇴근 후 2~3시간 정도 했던 것 같다. 주말에는 공유 오피스, 스터디 카페 같은 곳에서 좀 더 집중적으로 하기도 했다. 번역한 것을 넘기고 조용하다가 10개월 정도 후에 갑자기 이제 출간한다고 연락이 왔다. 그리고 마지막 작업들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내용을 다시 보느라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번역 자체의 작업 이외에도 할 일이 참 많았다. 전문 번역 작업은 어떤 사람에게는 쉽게 얻을 수 없는 기회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운이 좋아서, 주변의 도움으로 상대적으로 쉽게 기회를 얻은 것 같다. 기회와는 별개로 과정 자체는 참으로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점이 많았다. 반면에 배우고 느낀 점도 많았다. 경험이란 배울 점이 많아서 항상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배운 점
- 번역도, 글쓰기도 끈기가 많이 필요한 일이다. : 블로그도 하고, 지금 일하는 곳에서도 글 쓸 일이 많은데 어찌보면 내 인생에 가장 큰 덩어리의 글을 쓴 것 같다. 글은 엉덩이로 쓰는 거라는 말도 있지만 와닿지 않았는데, 그 말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같다.
- 원저자를 잘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 원문의 의도를 알기 힘든 경우가 꽤 많았는데 원저자와 소통이 원활치 않아 일부 내 생각대로 번역한 부분이 있다. 어떤 번역서들은 저자와의 인터뷰나 메일 주고받은 것들을 공개하기도 하는데 그건 행운인가보다.
- 기술 서적의 번역이 이루어지는 과정 : 지치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전체 과정을 한 번 겪어본 것은 좋은 경험이었다. 내가 서툰 것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사람 손이 많이 타고, 자동화될 부분도 많아 보였다.
- 한국어와 영어, 언어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다. 번역을 하는 동안에는 사실 한계를 느낄 때가 많았다. 나름 글 많이 읽고 쓰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많이 공부할 게 많이 느껴졌다. 어휘도 문법도, 표현이나 문화에 대한 것도 내 한계를 본 것 같았다. 그래서 이후로 더 많이 읽고, 공부하려고 하고 있다. 한동안 놓았던 영어 공부도 다시 시작했다.
- 기계 번역과 GPT : 일상에서 쓰기엔 좋지만 아직 전문적인 지식을 옮기는 데에는 한계가 큰 것 같다. 많이 발전했지만 아직은 단어를 옮기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복잡한 내용을 넣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을 내뱉는다. 그걸 책에 그대로 실으면.. 번역 구리다고 욕 먹는 책이 되겠다 싶어서 글자 이상의 의미를 담는 번역을 하려고 노력했다.
- 마무리는 (언제나) 쉽지 않다. : 많은 일들이 그렇지만 막판에 가면 계획했던,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일이 많이 생긴다. 번역에 있어서는 검수 리뷰가 가장 컸고, 이외에도 머리말, 책 소개, 겉 표지에 쓸 글, 번역자의 말, 색인 만들기 등등 자잘하게 할 일이 많다. 게다가 책을 전체적으로 3~4번 이상 본지라 지긋지긋한 상태이기도 하다. 마치 제품 출시 전에 3~4번 통합 테스트와 버그 수정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각종 산출물도 써야하고.. 그걸 잘 견뎌내고 제정신으로 마무리를 해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좀 쉬워질까..
출간 이후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2022년 7월에 시작한 일이 2024년 6월 28일 책의 출간으로 마무리되었다. 많은 번역서를 보며 이해하기 힘든 번역체와 낮은 품질, 티나는 기계 번역 등에 불만이 많았고 그런 것을 반복하지 않고자 노력했다. 가급적 번역체를 줄이고 자연스러운, 이해하기 쉬운 한국어로 옮기고자 했지만 나의 능력 부족과 시간의 한계로 적지 않은 아쉬움이 남는다.
앞으로
첫 번역이 참 힘들었지만, 가만히 노는 걸 잘 못하는 성격이라 다음 기회가 오면 또 번역을 하고 싶다. 책을 고르는 과정부터 전보다 신중히 하고 싶고, 툴셋도 좀 더 효율적으로 구성해보고 싶다. CAT 라거나 편집기도 번역 작업에 친화적인 도구를 써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