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개발자 크리에이터
어느덧 이곳에 온 지 3년이 지났다.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묵혀뒀던 회고를 이제야 시작해 본다.
개발자 크리에이터
2022년부터 S아카데미(익명)라고 부르는 대졸자 대상 소프트웨어 부트캠프에서 프로젝트 컨설턴트라는 역할로 일하고 있다. 처음 왔을 때 당황했던 부분은 나에게 기대되는 역할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었었다. 몇 년간의 경험으로 내가 정의한 나의 직무는 “개발자 크리에이터”다. 이전에 개발자로서 또는 PM으로서 코드를 만들고 제품을 만드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면, 이곳에서의 일은 개발자를 만드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
직무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하다고 느낀 이유는 이곳의 독특한 점 때문인 것도 있다. S아카데미는 1년 과정의 부트캠프로 소프트웨어 관련 전공을 한 사람도 있고 전혀 무관한 전공을 한 사람도 있다. 이 친구들을 취업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개발자로 만들기 위해 전반기 6개월 동안에는 프로그래밍 기초 교육, 알고리즘 등을 중심으로 집중적인 교육을 한다. 하반기 6개월 동안에는 약 7주 사이클로 하는 3번의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실전 경험을 쌓는다. 내가 있는 곳은 하반기(2학기)이다. 개발자 교육을 한다고 하면 자연스레 강사 같은 역할을 생각할 수 있다. 강의를 하고, 교육생의 질문을 받거나 하는 등 어느 정도 익숙하고 명확히 그려지는 부분이 있다. 실제로 1학기 강사님들은 이와 같은 역할을 한다. 하지만 2학기에서 같은 포지션에 있는 나(=프로젝트 컨설턴트)는 이와는 사뭇 다른 역할을 한다. 내가 “개발자 크리에이터”로서 하는 역할은 퍼실리테이터, 코치, 멘토, 강사, 매니저가 섞여 있다. 이렇게 다양한 역할을 한다니 뭔가 대단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때그때 필요한 상황에 맞는 역할을 하는 것 뿐이다. 여러 가지 역할을 말했지만 실제로 중요한 것은 퍼실리테이터, 코치(또는 멘토)라고 볼 수 있다.
퍼실리테이터
우선 퍼실리테이터의 역할이다. 2학기 과정은 1학기와는 다르게 굉장히 열려있다. 정해진 시간 동안 강의를 듣고 혼자 공부하는 게 아니고,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끝까지 팀으로서 자기주도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즉 교육생에게 주어지는 명확한 목표가 없다. 명확한 과정도 없다. 명확한 역할도 없다. 그야말로 백지상태다. 이런 1학기와 2학기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하는 역할이 퍼실리테이터다. 2학기 과정으로의 온보딩을 돕는 것이다. 교육생 입장에서 이런 백지상태는 어려움으로 찾아온다. 대학교와 비슷한 환경에서 수업을 듣고 공부만 하다가 백지를 받아 들고, 그것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뭔가 그려보라고 하면 당황할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잘 적응하는 경우도 있지만 동기 상실이나 자유가 방임으로 변질되는 경우, 동료들과의 협업 등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우선 큰 그림을 보여준다. 명확하지 않아 보이는 것을 보다 명확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그리고 동기와 목적을 찾을 수 있도록 한다. 필요할 때는 과제 방식으로 진행하기도 한다. 넘을 수 없어 보이는 “벽”을 “경사로”로 만들기 위해서다. 이 역할을 하는 것은 주로 초반에 집중된다. 교육생들이 어느 정도 2학기 과정에 안착이 되면 코치의 역할로 넘어간다.
코치
코치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준점이 되어주고 피드백을 주는 것에 있다. 교육생이 하는 질문 중에 가장 많이 보이는 단어는 “현업에서는”인 것 같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지, 실제로 회사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는 15년 동안 일을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해준다. 초반에 내가 교육생들에게 신뢰를 잘 구축했다면 내 말을 잘 따라준다. 하지만 종종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들어오기도 한다. 내 경험이 부족한 것도 있고 기술적 편향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바닥은 워낙 빨리 바뀌기도 하고. 내 지식과 경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때는 모른다고 하고 알만한 사람에게 물어보거나 같이 찾아보자고 하는 편이다. 잘 알지 못한 채 대답을 하면 교육생에게도 나에게도 손해이기 때문이다. 이는 내 역할을 잘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신뢰가 무너지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냥 둬도 잘하는 교육생도 종종 있다. 일을 하다 이곳에 온 경우도 있고 그냥 원래 센스가 좋은 친구들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코칭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나는 교육생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과정과 결과 모두 나아지도록 다양한 피드백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기획 과정에서 허술한 또는 가치가 없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올 때가 있다. 또는 기술 만능주의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해본 것,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머무르려는 친구들도 있다. 이 과정에서 내가 집중하는 것은 교육생의 성장이다. 프로젝트를 하기 전과 비교해 어떤 면에서 성장할 수 있는지 고민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내가 피하는 프로젝트의 형태가 몇 가지 있다. 우선 코딩 노가다식 프로젝트다. 기능은 많지만 반짝이는 무언가가 없는, 코드만 잔뜩 생산하는 것은 성장에 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때는 개발 볼륨을 줄이고 실패해도 좋으니 새로운 것에 도전하도록 돕는다. 반대로 막무가내 도전도 경계하는 편이다. 종종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프로젝트에 너무 치여서 회사에 가기도 전에 개발에 정이 떨어질 염려도 있기 때문이다. 이때는 자주 경과를 관찰하고 피드백을 주며 범위나 품질을 조율하는 편이다. 다만 너무 매니징이 되지는 않도록 한다. 사실 혼자서 10여 개 팀의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것이 어렵기도 하거니와 프로젝트의 결과는 모두 교육생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매니징인듯 아닌듯한 관리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교육생들과의 경계를 허물 필요가 있다. 쉽게 다가갈 수 있어야 솔직한 피드백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관계 형성이 잘 되면 다음으로는 멘토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멘토
교육생들이 이곳에 온 가장 큰 목적은 “개발자로 취업하는 것”이다. S아카데미의 설립 취지 또한 청년 취업에 있기 때문이다. 꼭 취업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업계 선배로서 좋은 얘기(+ 솔직한 얘기)를 해주는 것도 나의 역할이다. 현업 개발자들이 취준생을 대상으로 종종 자소서 코칭을 하거나 커피챗을 하며 업계 얘기를 해주는 경우도 이와 비슷할 것 같다. 나의 경우 금융권, 대기업 위주의 커리어를 가지고 있다. 내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취업이나 커리어에 대한 얘기를 해준다. 금융권, 대기업에서 바라는 개발자는 어떤 모습인지, 뭘 잘 해야 하는지를 주로 전달한다. 학생에서 사회로 나가는 데 필요한 징검다리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필요할 때는 자소서를 같이 봐주거나 면접 준비를 돕기도 한다. 이때는 기업 관점에서, 채용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피드백을 주려고 노력한다. 종종 자소서가 ‘내 입장에서’ 작성되는 경우를 본다. 자소서야말로 철저하게 남(기업) 입장에서 작성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리고 너무 겸손하거나 위축된 모습을 볼 때도 있다. 우리나라 채용 특성상 실패를 많이 맛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럴 때는 자신감을 북돋아주고 성공 사례를 얘기해준다. 회사 생활에 환상 또는 오해하고 있는 경우도 종종 만나게 된다. 친구 얘기, 선배 얘기(보통 저연차) 또는 인터넷에서 본 걸 철석같이 믿고 있기도 한다. 그게 도움이 될 때도 있겠지만 해로운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특히 취업을 앞둔 입장에게는. 꼭 취업이나 커리어에 대한 얘기에 국한하지는 않는다. 그냥 인생 선배로서의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건강 관리에 대한 것이 있겠다. 멘토로서 얘기할 때는 너무 단맛에 취하도록 하지 않게 경계하는 편이다. 일종의 백신을 놔준다고 할까. 회사 생활, 커리어로서의 개발자가 갖는 단점도 함께 얘기를 해준다. 멘토로서 내가 가지는 목표는 취업을 넘어 장기적인 관점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다. 그래서 태도와 같은 인간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자주 강조를 한다.
컨텐츠 크리에이터
나머지는 강사 역할인데 이는 컨텐츠 개발자에 더 가까운 것 같다. S아카데미에서는 전체 교육생을 대상으로 개발 지식을 전하는 방송을 하는데, 그에 적합한 컨텐츠를 선정하고 방송 형태로 만들고 실제 방송까지 진행을 한다. 다양한 곳에서 현직 경험을 쌓아 온 컨설턴트들이 나눠서 하고 있으며 나는 자바 파이썬의 최신 기능, 데이터와 인공지능, 개발자 추천 도서, 금융(핀테크) 관련된 내용을 위주로 하고 있다. 그 외에 반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컨텐츠를 만들기도 한다. 앞서 말한 퍼실리테이터, 코치, 멘토 역할을 위한 내용들이다. 대표적으로 프로젝트 초반에는 계획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다룬다. 개발 라이프사이클에 맞춰서 프로젝트나 기술 중심적인 것을 다룰 때도 있고 교육생들이 지쳐 보이면 분위기를 환기할 수 있는 가볍고 재미있는 내용을 준비하기도 한다.
마치며
길게 설명했지만, 간단히 보면 그냥 같이 이야기하는 사람, 피드백을 주는 사람이다. 나는 나 자신이 천성 엔지니어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대하는 것보다는 기계를 다루는 편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철저하게 사람 대 사람으로 역할하고 있다. 가끔 마음대로 안 되는 이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힘들 때도 있지만 성장하는 교육생의 모습을 보고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을 때는 정말 보람차기도 하다. 취업 직전 이라는 인생의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는 우리 교육생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PS. 제목은 씨네타운 나인틴의 이재익 형님이 쓴 책 “나 이재익 크리에이터”를 오마쥬 했다.